내 인생의 참된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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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b 작성일 23-06-19 23:25 조회 5,028 댓글 0본문
어렸을 때 생각했다. 울 엄마는 참 예쁘다고,
육남매 중 나만 엄마를 닮았다. 성격과 품성은 그렇지만,
내 나이들어 사진을 찍어보니 엄마와 너무 닮은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엄마는 정직하고 성실하고 희생적이셨고 착했다. 엄마는 그것을 내가 보고
내 정신에 스며들게 하셨다.
그것은 참 감사할 일이지만, 엄마가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은 그것 뿐이었다.
부모님은 두 분다 무학이셨고, 교육의 필요성을 몰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며칠만에 공장으로 돈벌러 나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셨고, 하루를 굶지않고 지내는 것이
어려울 지경인 집에서 나도 한푼이라도 벌어 보태야 한다는 생각에 공장으로 향했다.
교복입고 중학교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 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고
‘저 녀석 나보다 공부 못했는데..’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 공장에서 숙련공이 되어갈 무렵
길에서 친구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사실은 중학교 3학년 다닐 나인데.....’
라며 쓸데 없는 자기 위로를 하곤 했다.
사실 내 머리는 좋았던 것 같다. 공부를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겼던 부모님 덕에
공부를 안해도 되는 환경에서 맨날 들로 바다로 놀러만 다녔어도
시험치면 1등을 도맡다시피 했으니
하지만 누더기를 입고 다니고 회비를 못내는 내가 선생들 눈에도 그랬는지
중학교 안간다고 해도 누구 하나 학교 계속 다녀야 한다고 말해 주는 이가 없었다.
졸업 직전 일제고사에서 전교 2등을 했지만, 상도 받지 못했고 집에서도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교육의 필요성을 나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던 까닭에
나는 바닥에서 기는 삶을 10년 넘게 살아야했다. 손재주 좋고 일머리 좋아
공장에서는 나이 많은 형들에게 작업 지시를 할 위치에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부상을 당하고 죽음의 순간을 비껴 가기도 하면서 10여년 동안
내가 얻은 것은 두 개의 손가락 반마디씩 잃어버리고 자다가도 문득 떠오르면
몸서리 치게되는 악몽같은 힘든 순간들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신 뿐 이었다.
엄마는 내게 이제 말씀 하신다.
‘미안하다 아들아 어짜겠노 그기 니 운명인 것을....’
‘안젤라에게 불러주었던 노래’에서 말했듯 폐인처럼 지내다
성당을 나가게 되었고 욕설과 소음으로 가득찼던 내 삶에 노래와 봉사라는 즐거움이
자리를 잡았다.
믿을 수 없는 말들을 듣게 되었다.
‘잘생겼다’ ‘멋있다’ ‘해맑다’ 부모님은 한 번도 해주지 않던 말
자주 들으니 정말일까? 혹시 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사제가 되신 기타 잘 치던 이냐시오는 내 첫인상이 부잣집 아들같았다고 했다.
병약하고 파리한 얼굴이 그렇게 보였나보다.
어쨌든 나는 행복한 시절을 맞이했고 마음이 부유해졌으나 여전히 가난하고 병약했다.
그것을 잊을 만큼 평화로웠다.
그리고 나는 천사와 결혼을 했다.
내가 처한 모든 현실과 내세울 것 하나없는 나의 속속들이를 다 알면서도
나와 결혼한 안젤라를 나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성당에서 만나 연인이 되고
성당에 취직을 하고 병이들어 5년간 투병을 하고 이식수술을 받고 성당에 복직을 하고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있지만, 다 건너뛰고 안젤라는 결혼 후에 나를 교육시켜 주었다.
성당일을 그만 두고 세탁일을 하던 시절 검정고시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야간 학원에 등록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공부하러 다녔고 공부는 적성에 맞고 즐거웠다.
검정고시 학원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다음에 써보려한다.
1년 만에 중학교 졸업 자격을 얻었다.
안젤라는 이번에는 방송고등학교를 가라고 했다. 그대로 따랐고,
우수한 인재로 상까지 받으며 대입자격을 3년만에 얻었다.
이제는 은근히 만족이 되었다. 이력서에 고졸이라고 적는 것은 자랑스럽진 않아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미 안젤라는 방송대학교의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수필 부문 글을 써서 상을 받은 경험이 3번 있었다.
그래서 그럼 국문과같은데 가서 글쓰는 것 배워볼까? 했더니
‘돈안된다. 씰데없고 유아교육과 가라’ 나중에 나랑 같이 어린이집 하자‘
글 쓰려면 문예창작과 같은 곳을 가야하는 것도 모르던 나는 고분고분
유아교육과를 진학했고 주경야독 열공하여 전학년 장학생으로 학사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우리부부의 꿈인 어린이집을 시작하긴 했으나 내가 졸업하던 그해 문을 닫아
나는 보육교사라는 새로운 직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이력이 되었다.
방송고에서도 특이한 경험이 많았고
방송대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도 써보고 싶다.
무식한 철공소 공원이었던 내 인생을
’선생님‘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들을 수 있게 만들어준
내 사랑스러운 스승 안젤라는 요즘도 나를 꾸준히 가르치고 있다.
’운전할 때 집중해라‘ ’험한 말 쓰지마라‘ 운전하다가
법규 안지키고 위험한 운전 하는 사람들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저 바보자슥이...‘ 인데 그마저도 듣기 싫단다.
네네 선생님 선생님 말씀은 항상 옳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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